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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그리고 시어머니

친정엄마와 나는 애증의 관계2

by 토끼랑께 2021. 3. 21.

오늘 나를 제외한 두동생과 올케 그리고 남편이 친정엄마가 입원 중이신 노인요양병원에 면회를 다녀왔다. 코로나 19 거리두기 단계가 완화되며 작년 12월 첫째 주 이후 금지되었던 노인요양병원의 비대면 면회가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노인요양병원 입원 후 고관절 골절과 코피 과다출혈로 응급실을 두 번이나 다녀왔던 친정엄마는 남편 말에 의하면 많이 좋아지셨다고 한다.

나의 암 요양병원 생활

5년 전 집을 떠나 암 전문 요양병원에서 생활을 하며 처음 항암치료를 할 때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항암치료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딸 때문에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암 요양병원에서 매주 한 번씩 교회에 다니는 암환우들의 모임에 참석해서 함께 찬양도 부르고 성경도 읽으면서 각자의 기도제목을 내어 함께 기도도 했다. 하루는 같은 병실에 있는 암환우가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을 믿기 그 이전부터 이미 나를 다 지켜보고 계셨고 나의 마음속 모든 것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때 나는 내 마음을 알아주고 계시다는 말에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었고 큰 의지가 되었다. 든든한 내편이 생긴 것 같아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아침에 깨면 눈을 뜰 수 있게 해 주심에 감사기도를 했고 찬양을 불렀다. 고주파 온열치료를 비롯해 병원 치료도 열심히 받았고 병원 근처에 있는 공원에 나가 운동도 열심히 했다.

친정엄마를 위한 기도

암 요양병원에 주 1회 봉사하러 오시는 권사님이 내게 감사노트를 작성해보라고 해서 매일 작성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친정엄마 생각이 났다. 친정엄마는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 교회에 다니면서 주일학교 교사까지 했었다고 한다. 어려서 가끔 엄마가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친정엄마는 아버지와 결혼하면, 아버지를 교회에 다니게 전도할 거라고 큰소리를 치며 결혼했다고 한다. 그러나 종갓집 맏며느리로 사느냐 오히려 친정엄마가 교회를 다니지 못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고 한다. 나는 그날부터 친정엄마의 구원을 위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날마다 친정엄마를 위해 기도하다 보니 내게 서운하게 하셨던 마음은 멀어지고 내게 잘해 주었던 생각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친정엄마의 입원과 처음 듣는 이야기

내가 암 전문 요양병원에서 입원해 있던 어느 날 엄마는 갑자기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을 하시게 되었다. 고혈압과 당뇨가 있었던 엄마는 부정맥 진단과 신부전증 진단을 받게 되었다. 나는 친정엄마가 구원도 못 받고 갑자기 돌아가실까 봐 걱정이 되었다. 마침 봉사활동을 왔던 권사님에게 나의 마음을 이야기했더니 권사님이 같이 봉사 오시는 집사님과 병원에 있는 친정엄마를 찾아갔다. 두 분은 친정엄마에게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고 인사를 하고 여러 시간 함께 이야기하면서 내 마음을 전달해 주셨고 친정엄마는 그분들 앞에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구원을 믿는다고 하면서 결혼 전에 교회에 다녔던 이야기까지 하셨다고 한다. 나를 임신할 당시 태몽이야기를 하셨는데 우물에서 나온 할아버지가 수저를 한 아름 들고 나와서 엄마에게 건네주는데 수저가 모두 꽃으로 변했다고 한다. 친정엄마는 내가 하나님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하셨다고 말씀하셨고 이제라도 내가 교회에 다니게 된 사실이 기쁘다는 말씀까지 하셨다고 한다. 친정엄마의 갑작스러운 입원이 엄마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계기가 된 것으로 나는 믿었고 내 마음이 엄마에게 전달이 되었다는 게 기뻤다. 내가 엄마에게 표현을 못하듯 어쩌면 엄마도 내게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앞으로는 친정엄마와의 관계도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친정엄마의 망설임

친정엄마는 퇴원 후 제사도 지내셨고 교회에 나가지도 않으셨다. 나를 대하는 태도에도 변화가 전혀 없었다. 하루는 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엄마 찾아가서 만났던 분들한테 교회 나간다고 하셨다면서 왜 교회에 안 나가시느냐고 물었다. 엄마는 남동생한테 제사 물려주고 난 후에나 다니실 거라고 했다. 언제 물려줄 거냐고 물었더니 대답을 안 하신다.

친정엄마와 다시 시작된 갈등

항암치료를 하면서 입원했던 암 요양병원생활을 일 년간 한 후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다시 친정엄마와의 갈등은 시작이 되었다. 나는 친정엄마의 건강이 염려가 되어서 믹스커피나 설탕 등 음식조절을 하시라고 하고 친정엄마는 나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커피믹스 한봉에 설탕 두 스푼을 첨가해서 드신다. 불편한 몸으로 동네 사람들이 김칫거리를 줘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며 엄청난 양의 김치를 하신다. 이웃분들이 도와줄 때도 있지만 결국은 내가 같이 도와줘야만 마무리가 되었다. 김칫거리는 공짜로 준 것이 아니고 엄마가 뽑아오라고 돈을 지불하고 있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김치 한번 하고 나면 나는 그다음 날 꼼짝도 못 하고 종일 앓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친정엄마를 대할 때 제발 감정적으로 대하지 말고 엄마 입장에서 생각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고 나간다. 하지만 나는 번번이 친정엄마 앞에서 또 결심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몸이 지쳐서 밥을 제대로 못 먹게 되면 다시 암 요양병원에 입원하고, 회복이 되면 집으로 오는 생활을 몇 번을 반복하며 살았다.

친정엄마의 뚜렷한 취향

엄마는 건강이 점점 나빠지는 데도 식이요법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단백질 섭취를 위해 쇠고기를 먹고 생선을 먹어야 한다고 해도 들은 척도 안 하고 밥에 물을 부어서 김치 한 가지랑 먹거나 밥에 김치 국물을 부어 순식간에 먹고 만다. 내가 그러다가 신장투석을 해야 할지도 모르니 제발 음식 좀 가려 드시라 해도 들은 척도 안 하셔서 나 혼자 말하다 지친다. 신장이 안 좋아지니 몸까지 부어 원래도 XXL를 입으셨는데 그 옷도 맞지를 않는다. 최근에야 인터넷이나 홈쇼핑에 큰 옷들도 나오지만 그때만 해도 다양한 디자인이 아니어서 구입해도 수수료를 내고 반품하기 바빴다. 사이즈가 안 맞는 것이야 바꾸지만 색상이나 디자인은 아주 싫지 않으면 입으실 만도 한데 친정엄마에게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요즘은 신장투석을 하면서 살이 빠져 XXL나 105 사이즈도 입게 되어 다행이다.

점점 나빠지는 친정엄마의 건강

그 후로 친정엄마는 심장박동기를 심게 되었고, 오이지를 만들다가 끓는 소금물을 두발에 쏟아 3도 화상을 입고 입원 치료를 받기도 했다. 점점 몸이 안 좋아진 엄마는 심정지가 오게 되었고 심폐소생술로 겨우 살아나셨다. 나는 친정엄마가 하루에 연거푸 두 번의 심정지가 왔을 때 그대로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친정엄마를 보며 오래도록 마음에만 담고 있던 말을 처음으로 꺼냈다."엄마 내가 엄마 많이 사랑해 ~"라고 나는 친정엄마가 무서웠었고 나를 귀찮다며 뿌리쳤던 그 기억 때문에 더 엄마한테 다가가지 못해 왔는데 아무 힘없이 눈감고 있는 약한 모습의 엄마를 보니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용기가 났던 것 같다. 그때는 모두가 친정엄마가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담임목사님께 부탁해서 영접기도까지 했다. 나는 친정엄마가 살아나시기만 한다면 그동안 못한 딸 노릇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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