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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그리고 시어머니

친정엄마가 내게 쏟았던 열정

by 토끼랑께 2021. 3. 8.

친정엄마는 내가 객관적 시각으로 봐도 상당한 미인이셨다. 눈 화장을 하지 않아도 짙은 검은 눈썹과 쌍꺼풀진 눈, 오뚝한 코, 도톰한 입술에 시원시원한 얼굴이셨다. 아버지도 인물이 좋으신 편이었는데 친정엄마는 외모를 중시하는 분이었기에 맞선을 보고 잘생긴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 결혼하신 거라고 했다.

 

 

 

 

못생긴 딸이 창피했던 친정엄마

친정엄마의 표현에 의하면 내가 태어났을 때의 모습이 쌍꺼풀도 없고 코는 들창코에 아랫볼이 살이 찌고 이마는 좁아 마치 못생긴 참외 같았다고 했다. 너무 못생겨서 자신이 낳은 것 같지 않았고 친정에 나를 데리고 가야 하는데 창피해서 가장 예쁜 옷을 입히고 최대한 얼굴이 안 보이게 모자도 씌워 데리고 가셨다고 한다. 친정동네 어른들이 나를 보고는 예쁘다는 말은 안 하고 "귀엽네 "하고 얼버무렸다며 엄마는 자라는 내내 남동생의 잘생김과 나의 못생김을 비교를 했었다. 친정엄마는 결혼 후에도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다달이 용돈을 챙겨주셨었다. 그 돈을 시댁에 사용하기도 했지만 주로 나와 동생의 옷 구입비로 많이 사용하셨던 것 같다.

 

 

강진 달빛 한옥마을 여락재

 

 

 

딸이 모든 일에 최고여야 했던 친정엄마

어렸을 때의 나는 편식이 심하여 밀가루 음식인 과자, 국수, 빵을 먹기 싫어했고 죽이나 떡도 먹지 않았다. 콩이나 파는 씹히면 비위가 상해 음식물을 뱉어 버려 엄마한테 많이 혼이 났었다. 몸이 약했었는지 겨울이면 항상 편도가 붓고 기침을 많이 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인지 동네 친구들이 모여 고무줄놀이를 하거나 뛰어노는 것이 흥미가 없어 집으로 들어와 혼자 책만 보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나를 엄마는 작은 돌을 골라서 내게 공깃돌 놀이 방법을 가르쳐주었고 고무줄놀이 연습을 시켜 친구들과 놀게 했던 기억이 난다.

 

 

강진 달빛 한옥마을 여락재

 

 

친정엄마의 치맛바람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만해도 친구들은 대부분 검정고무신이나 코 고무신을 신고 다녔고 더러는 책가방 대신 보자기에 책을 싸서 갖고 다니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와 남동생은 주로 운동화나 구두를 신고 다녔기에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었다. 거기다 엄마는 시골에서만 있으면 세상을 모른다고 시내에 나갈 때면 4km가 되는 학교에 와서 나와 동생을 데리고 시내에 자주 데리고 나갔고 방학만 되면 서울에 사는 외삼촌댁으로 보내 사촌들과 함께 공부를 하게 했다. 엄마는 우리들의 학교 성적이 1등이어야만 했기에 그 시절에 과외까지 시켜가며 학교 성적관리를 했다. 엄마의 적극적인 학교 출입과 식사대접으로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나와 동생을 잘 알았다. 지금은 있을 수 없었던 일이지만 그 당시는 정이라는 명목 하에 엄마의 치맛바람? 은 대단했었다. 남동생은 그런 엄마를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나는 친구들이 '신용 보따리'라는 말로 놀리는 것이 부담스럽고 미안했었다.

 

 

강진 달빛 한옥마을 수류화개

 

 

 

친정엄마의 공부 욕심에 버거웠던 나

중학교에 들어가서 첫 월말고사를 보았는데 입학할 때 본 반배치고사보다 성적이 뚝 떨어졌다. 엄마는 난리가 났고 담임선생님과 면담 후 담임선생님 소개로 개인과외를 하게 했다. 집에서 중학교에 가려면 15분을 걸어 나가서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매일 막차를 타고 집에 들어갔고 체력이 약한 나는 결국 조회시간마다 빈혈로 쓰러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스트레스였던 것 같다. 가슴이 답답하며 옥조여 오고 숨쉬기도 힘들었다. 일반병원 진료와 한의원 진료까지 받던 나는 휴학 권유까지 받았었다. 다행히 바로 여름방학이 시작되어 휴학 대신 전과목 방학숙제를 면제받았고 엄마는 내게 공부에 대한 강요를 더 이상 하지 못했다.

 

 

 

 

친정엄마는 6.25 전쟁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집안 모든 일을 이끌어가야 할 외할머니를 대신해서 6.25 전쟁 당일에 태어난 12살 어린 남동생을 엎어서 키우셨고 초등학교 6학년에 학업을 포기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더 우리들에게 공부를 더 시키셨던 것 같다. 엄마는 남동생이라도 제대로 뒷바라지해야겠다는 생각이셨는지 중학생인 동생을 서울 외갓집으로 보내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게 하셨다.

 

백련사 홍매화

 

여고 다닐 때 생일날 학교로 생일 떡을 해온 엄마

나는 생일이 한여름의 끝이다. 내가 어릴 적부터 떡을 좋아하시던 할머니는 내 생일이 되면 풋콩을 넣고 하는 설기를 하게 했다. 나는 떡을 전혀 먹지 않는데도 말이다. 엄마는 할머니가 원하는 대로 내 생일 때마다 떡을 했다. 여고시절에 교통의 불편함 때문에 시내에 사는 작은아버지 댁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내 생일이 되자 할머니는 떡을 해서 갖다가 주라고 하셨다며 엄마는 시내 방앗간에서 떡을 해서 학교로 이고 오셨다. 친구들은 신나서 잘 먹었지만 그 당시의 나는 시선을 받는 게 달갑지 않았다. 할머니의 성화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엄마도 떡을 해주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떡 덕분에 나는 반 친구들 전체에게 생일 축하를 받았다.

내게는 엄하고 무서운 엄마

어릴 적 내게 친정엄마는 너무도 엄하고 강하신 분이었다. 엄마의 말이 곧 법이었기에 내 의사표현은 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워낙 엄마의 뜻이 확고해 오히려 핀잔만 듣고 집안이 시끄러워지니 나는 점점 엄마에게 내뜻을 말하지 않게 되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명절에는 한복을 입고 일을 했다

 

혼수를 친정엄마가 다 준비하다

결혼연령이 되면서 맞선을 본 후 결혼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엄마는 내가 결혼해서 입을 옷과 살림살이를  나를 데리고 가지 않고 혼자 서울에 가서 다 사 갖고 왔다. 결혼하면 시어른들하고 사니 일 년은 한복을 입고 살라고 한복을 계절별로 2벌씩 8벌을 했고 긴 홈드레스를 계절별로 사 왔다. 나는 이미 다 사 와버렸으니 내 의견을 말해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에 그대로 받아들였다. 어차피 결혼하고 나면 엄마가 더 이상 내게 이런 일을 또 할 일은 없겠지 하는 마음에 말이다. 그러나 그건 내 착각이었다.

 

 

 

 

결혼 후에도 계속되는 엄마의 관심

결혼 후 친정엄마는 봄이면 시아버님 갖다 드리라고 쑥 인절미를 집에서 손수 한말을 만들어 보내고, 여름이면 열무김치를 들통으로 한통을 해서 보냈다. 시아버님이 사부인 음식 솜씨가 너무 좋으시다며 열무김치 장사하셔도 되겠다고 칭찬하셨다. 친정엄마에게 시아버님이 하신 말씀을 전했더니 그 후로 수시로 보내주었다.

 

 

성산 아줄레주 수제청과 에그타르트 그리고 아메리카노

 

 

시동생 결혼식에 잔치음식과 도와줄 동네 아주머니까지 동원하다.

요즘은 집에서 잔치음식을 하지 않고 예식장에서 뷔페로 하지만 30년 전만 해도 음식점에서는 갈비탕이나 잔치국수만 하고 나머지 음식은 집에서 준비를 해서 대접을 했었다. 큰 시동생이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시댁에서는 우리 결혼식 때 했듯이 집에서 음식을 안 하고 미군부대에서 뷔페 음식을 주문해서 하기로 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친정엄마는 5,6가지의 잔치음식을 손수 만들어 동네 아주머니 5분까지 동원해서 시댁 잔치에 와서 음식 대접을 도와주고 가셨다.

 

 

 

 

나도 딸을 일 년 전에 결혼을 시켰지만 아무리 딸이 염려가 되더라고 친정엄마처럼 시댁 잔치까지 나서서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친정엄마는 어쩌면 나를 엄마 자신이라고 생각하셨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친정엄마의 나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거다.

 

 

제주 성산 카페 아줄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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