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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그리고 시어머니

친정엄마와 나는 애증의 관계 1

by 토끼랑께 2021. 3. 15.

친정엄마의 안쓰러운 모습

지금의 친정엄마를 바라볼 때 엄마에게 서운했던 마음은 다 없어졌고 안타깝고 애잔한 마음만 남아 있다. 친정엄마의 남은 삶이 몸과 마음이 평안한 삶 되시길 간절히 기도하며 엄마를 대하는 나의 마음에 변화를 주신 분께 감사하고 있다.

 

 

친정엄마의 사랑이 고팠던 나

엄마는 활달한 성격에 무엇이든 거침없이 잘하시는 분이었는데 어릴 적 나는 밖에 나가서 친구들하고 뛰어노는 것보다는 동화책 보는 것을 좋아했다. 친정엄마는 남들이 보는 시선과 평가가 중요한 분이었고 내가 무엇이든 잘하기를 바라셨는데 나는 그 기대에 늘 못 미쳤다. 그리고 대가족이다 보니 엄마는 늘 분주하고 바빴다. 그런 엄마 품에 안기려 하다 귀찮다며 밀침을 당하기도 했고 밤에 아파 징징거리다가 혼이 난적도 있었다. 그 후로는 엄마에게 애교를 부리며 달려가 품에 안기거나, 아프다는 투정도 안 했고, 무언가를 요구하기 위해 떼를 써보지도 못하며 컸던 것 같다. 중학교에 들어 가서부터는 학교생활이나 친구들과의 이야기를 엄마에게 거의 안 하고 살았던 것 같다. 친할머니가 그런 나를 남동생보다 더 아껴줬고 엄마를 대신해서 비가 오면 우산을 챙겨주고 밤에 늦게 끝나면 큰길 버스정류장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할머니가 계셨기에 믿고 그러신 면도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친정엄마를 안심시켜 드리려 했던 말이

결혼 후 시집살이를 하며 한 번도 친정에 가서 시댁에서 힘들거나 안 좋은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친정부모님 걱정시키기도 싫었지만 내가 힘들다는 말을 하기 싫은 것도 있었다. 내게 다정한 엄마는 아니었지만 내 딸이 늘 아깝다고 생각하는 분이어서 굳이 안 좋은 이야기를 해서 속상하게 하기 싫었다. 친정엄마를 생각해서 시댁의 좋은 이야기만을 했는데 엄마는 친정보다 시댁이 그렇게 좋으냐고 하시며  못마땅해했다.

 

 

친정살이

결혼한 지 10년이 되었을 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친정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친정엄마는 반대를 했는데 친정 할머니가 우겨서 들어가 살게 되었던 거였다. 내가 친정집에 들어가던 날 친정엄마는 동네 창피하다고 해가 질 때를 기다렸다가 집 뒤 과수원길을 통해 남들 눈을 피해 집에 들어오게 했었다. 친정집에서는 초등학교 1학년과 4학년인 두 아이와 친정 할머니와 살았다.  2년간은 엄마가 마을 회관에서 부녀회 공판장을 하시며 공판장에서 숙식을 하셨기에 큰 문제없이 살았었다. 그런데 엄마와 한집에 살면서 여러 가지로 부딪히기 시작했다. 말이 부딪힌 거지 늘 내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입장이었다.

 

 

첫 번째가 음식이었고 두 번째가 아이들을 키우는 방식이었다. 첫 번째 음식 부분은 내가 음식을 아예 만들지 않고 설거지와 청소 빨래만을 하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그런데 아이들 키우는 방식은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고 아이들도 그 부문에서는 커갈수록 더욱 힘들어했다.  분가를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친정 할머니의 만류로  다시 주저앉게 되었다. 몇 년 후 친정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엄마의 건강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어린 자식들 돌봐줬더니 아픈 친정엄마 두고 나간다는 소리들을 까 봐 한집에 계속 살게 되었다.(나 역시 내 자식보다 남의 시선을 더 의식했었나 보다.)

 

 

친정엄마의 염려

내가 암이 걸린 사실을 수술한 후에 알게 된 엄마는 '지 에미가 대국년 같으니 아파도 아프단 말도 안 했네" 하시며 통곡을 하며 울었다는 소리를 남편을 통해서 들었다. 내가 항암치료를 받고 병원에서 퇴원을 하면 며칠씩 음식을 못 먹고 있었다. 엄마는 남편이 음식을 사러 나간 사이 불편한 몸으로 음식을 만들어 놓고 마루에서 큰소리로 밥 갖다 먹으라고 소리 지르신다. 나는 먹을 수가 없는데 불편한 몸으로 음식을 만드는 친정엄마가 안쓰러웠다. 먹기 힘드니 다음부터는 만들지 말라고 당부를 하며 조금 기운 차리면 내가 일어나 해먹을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그래도 매번 음식을 만들어 놓고 소리를 친다. 그리고 거의 먹지 못한 상을 내가면 속상해하며 이렇게 안 먹으면 어떻게 사느냐고 한숨을 내쉰다. 그 후로는 남편이 나를 대신해 몇 숟가락을 먹고 내가 먹었다고 거짓말을 해서 친정엄마를 안심시키고는 했다.

 

 

친정엄마의 이중 잣대

이렇게 내가 못 먹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엄마는 매번 돌아오는 제사를 지내신다. 선산이며 윗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은 이미 남동생에게 다물려 주셨으면서도 제사는 안 물려주신다. 친정에서 사는 내내 나는 제사 때마다 회사에서 돌아오면 엄마가 음식 준비하느냐고 어지럽힌 주방을 치우고 내게 할당된 음식 준비를 해놓고, 제삿날도 다 가버리고 난 뒷 설거지와 청소를 새벽까지 하면서 살았었다. 윗집 당숙모가 집에 환자가 있으면 제사를 안 지낸다는데 왜 지내냐고 말리니" 쟤는 출가외인이니 상관없어"라고 하시며 제사음식을 준비한다. 나는 음식 냄새도 못 맡아 꼼짝도 못 하고 방에 누워 있는데도 말이다. 남동생과 올케가 이제는 저희가 하겠다고 해도 당신 살아 있는 동안은 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친정엄마에 대한 서운함의 폭발

친정엄마는 맏며느리로서의 책임감이 엄청 강하신 분이고 그러다 보니 내가 아프다는 이유로 제사를 안 지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며 엄마가 내게 서운하게 했던 모든 일들이 떠올랐고 친정엄마 때문에 내가 암에 걸렸다는 생각까지 들게 되었다. 거듭된 항암치료로 몸도 마음도 지쳐있던 나는 어딘가 원망의 대상이 필요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처음으로 엄마에게 말대답도 하고 그동안 참았던 말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처음으로 남들에게 친정엄마 흉도 보았고 가슴속 모든 것을 끓어내며 울기도 엄청 울었던 것 같다. 그런 상태로 8개월간 암수술과 항암치료를 집에서 했고 항암치료가 끝난 지 6개월 만에 폐 전이로 다시 암 수술을 하게 되었다. 암 전문병원을 찾게 된 것도 일 년의 생활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서 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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