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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그리고 시어머니

친정엄마이야기

by 토끼랑께 2021. 2. 15.

친정엄마는 15년 전에 척추수술을 시작으로 많은 수술과 위급한 순간을 넘기며 살아가고 계시다. 그런 엄마를 바라보는 나의 바람은 살아계시는 동안 더 아프지 말고 마음 편하게 지내시는 것이다.

나를 낳고도 곱기만 했던 친정엄마(왼쪽 뒷줄에 앉으신 분)

강하고 통이 큰 친정엄마

친정엄마는 여장부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엄청 강하고 통이 크신 분이다. 그 연세의 어머니들이 다 그러하듯 6.25 전쟁을 겪으셨고 종갓집에 시집와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댁 살림을 도맡아 하셨다. 친할머니 말씀에 의하면 엄마를 맏며느리로 맞이하고 몇 가지 일을 겪으며 지켜보니 살림을 엄마한테 맡기는 것이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드셔서 일찍 살림을 넘겨주었다고 한다. 어릴 적 기억으로는 작은엄마나 고모들이 오면 할머니가 나서시기 전에 엄마가 농사지은 쌀부터 야채 잡곡 등을 아낌없이 내어주셨고 그런 통 큰 엄마를 할머니는 동네 마실 나가서 칭찬을 하셨다.

친정부모님의 젊은 시절 사진

엄마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는 시조부모님, 시부모님, 시동생, 시누이들까지 있는 시집살이에 힘겨울 엄마를 위해 한 달에 한 번은 꼭 친정에 직접 데려다주고 2~3일을 쉬게 한 후에 데리러 가셨는데 오는 길에는 평택시내에서 영화구경을 하고 짜장면 한 그릇이라도 사 먹여서 집으로 돌아오는 자상한 남편이었다. 아버지가 40대 초반에 당뇨병에 걸리셨는데 엄마는 당뇨병에 좋다는 약을 구하기 위해 전국을 다 돌아다니셨던 것 같다. 엄마의 정성 덕분에 당뇨병이 있어도 건강하게 잘 지내시던 아버지는 49세에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50일 가까이 혼수상태로 있다가 의식이 돌아왔는데 사고 당시 뇌출혈로 인해 언어장애가 와서 돌아가실 때까지 말씀을 못하셨다. 1년간의 병원생활 동안 엄마는 아버지 곁에서 온 정성을 다해 간호를 하셨고 집으로 오셔서 3년 정도를 더 사시다가 급성폐렴이 와서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날 엄마는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거듭하면서 "당신 지금 서울 큰 병원으로 옮기면 살 수는 있겠지만 이제 당신 고생 덜 하게 이제 보내주려고 하는데 그래도 되겠냐"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셨다. 엄마는 3년 전 아버지가 중환자실에서 했던 그 고생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도 그런 엄마의 마음을 아셨는지 고개를 끄덕이셨고 아버지는 그렇게 평택에 있는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앞마당에 핀 함박꽃을 좋아 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모든 일을 감당하신 엄마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 나이가 53세였다. 엄마는 경운기와 트랙터까지 운전하며 농사일을 하셨고 집안 대소사 모든 일의 결정을 혼자서 내려야만 했다. 그리고 동네일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일하셨다. 이 일은 아버지 살아계실 때부터도 했던 일인데 동네 부녀회 일을 수년간 맡아서 했고 선거철이면 선거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동네 경조사에 엄마가 가야 음식 준비를 무엇을 하고 얼만큼 해야 하는지가 결정되고 시장 보는 일도 엄마가 앞장서서 하셨다. 말 그대로 엄마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일을 했고 아파서 눕는 일도 거의 없어 몇 년에 한 번 엄마가 아프면 동네 사람들이 다 걱정을 할 정도였다.
매사에 언행일치가 되고 어려운 일을 거침없이 해결하는 엄마는 집안에서도 동네에서도 주도적으로 일을 하시는 분이었다. 추진력도 있던 엄마는 자신의 뜻에 어긋나거나 반기를 드는 사람은 용납하지 않고 바로 응징에 들어가기에 이웃집 아주머니들도 엄마의 눈치를 볼 정도였다. 아들은 내게 "외할머니가 우리 동네짱이야!"라고 말하곤 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할머니는 10년을 건강하게 더 사셨고 87세의 나이에 한 달 정도 집에서 누워만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누워서 꼼짝 못 하시고 정신이 오락가락하시는 할머니의 대소변을 다 받아낸 것도 엄마였다.

꽃을 좋아하셔서 봄이 되면 꽃화분을 사다 놓았다.

먼저 돌아가신 분들로 인한 아픔

6.25 전쟁으로 전쟁 당일 태어난 막내아들을 남겨두고 갑자기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죽음, 49세 돌아가신 엄마의 친정오빠 그리고 49세에 교통사고로 고생하다 돌아가신 아버지... 엄마에게는 너무도 아픈 기억들일 거다.
젊은 나이에 엄마 곁을 떠난 엄마의 사랑하는 분들이 있기에 엄마와 한집에 살면서도 암이라는 말을 나는 할 수가 없었다. 암 진단을 받고 수술하기 위해 입원하러 가면서 연수원 합숙교육을 들어간다고 했었다.

엄마가 좋아하시는 소국

점점 나빠지는 엄마의 건강

내가 아프기 7,8년 전부터 척추 디스크 수술을 시작으로 많은 수술을 했던 엄마는 내가 암으로 고생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건강이 더 나빠지셨다. 어느 날 쓰러져 심장박동기를 심고 살게 되었고 그 후로도 많은 사건사고로 수술과 입원을 반복했는데 그 이야기는 일전에 전했으니 생략한다. 엄마는 여러 번의 입원에도 타고난 체력 때문인지 아니면 의지 때문인지 의사의 말보다 빠른 회복을 보이셨다. 엄마가 입원하고 며칠 후 입원실에 찾아가면 엘리베이터 앞에서 부터 이미 엄마의 큰 목소리가 들린다 병실에 들어가 보면 엄마손에는 TV 리모컨이 들려있고 병실의 입원환자와 보호자들은 이미 우리 집안의 모든 일을 알고 있다.
세상 무서울 것 없이 당당하고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던 우리 엄마 그런 강한 엄마 때문에 난감한 적도 많았지만 동생들과 나는 다른 환자분들한테는 죄송하지만 어디 가든 기죽지 않으셔서 다행이라며 웃고는 했다.

낯선음식은 절대로 안드시더니 손주사위가 해준 스파게티는 하나도 안남기고 다 드셨다.


그런데 그것도 이제 옛말이 된듯하다. 작년 11월 중순에 일주일에 3번씩 신장투석치료를 위해 통원치료를 하는 것이 힘겹다며 입원을 하시더니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를 못하신다. 겨우 일어나 한번 갔던 화장실에서 또 주저앉아 고관절 수술을 한 후로는 우리를 잘 알아 보시지도 못하실 때가 많아지고 전화로 통화를 하면 대화가 불가능할 때도 많다. 간호사 선생님들 이야기로는 거의 눈만 감고 계시고 말씀도 거의 안 하신단다.

2012년 우리집 김장담그는 날


내게는 자상하고 따뜻한 엄마이기보다는 엄격하고 무서운 엄마로서의 기억이 더 크지만 지금의 엄마의 모습이 너무도 안쓰럽고 서글프다. 강한 엄마의 모습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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