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엄마 그리고 시어머니

아버지! 내 그리운 아버지!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by 토끼랑께 2022. 5. 10.

아버지의 영정사진

얼마 전 남동생이 친정아버지 영정 사진을 친정엄마 영정사진과 같은 사이즈로 새로 제작을 한다며, 앨범에서 결혼식에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찍은 사진을 가지고 갔다.
며칠 후 남동생이 편집한 영정사진을 보내주었는데 마치 최근에 찍은 사진처럼 선명하게 잘 나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사진 속 아버지는 48세의 젊고 잘생긴 모습 그대로였다.
친정아버지의 건강했던 젊은 시절 모습을 보니 그리움보다 아픔으로 남아 있는 친정아버지가 새삼 너무 보고싶다.

가족들에게 한없이 다정했던 아버지

친정엄마는 내게 무서운 호랑이 같은 엄마였다면 친정아버지는 한없이 다정한 분이셨다.
친정아버지는 마을 회의나 일 관련해서는 자신의 뜻을 강하게 주장하고 큰소리치는 분이셨는데 가정에서는 큰소리 한번 내는 적이 없으셨다.
나는 물론 동생들도 자라면서 아버지에게는 큰소리로 야단맞은 기억이 한 번도 없다.
친정아버지는 친정엄마에 대한 애정표현을 가족들 앞에서 숨기는 분이 아니셨다.
시골 큰 살림에 아무리 바빠도 한 달에 한 번은 친정엄마를 외갓집에 보내 며칠 쉬게 하셨다. 친정엄마가 돌아오는 날은 직접 외갓집에 가서 친정엄마를 데리고 오면서 시내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사 주셨다.
늘 어느 잔칫집 음식보다도 엄마가 해준 음식이 가장 맛있다고 하셨고, 친정엄마 생일에 시장에서 엄마 속옷을 사 갖고 오셔서 "내가 제일 큰 사이즈로 달라고 했지~" 하며 검정 비닐봉지를 흔들어 보이며 "허허" 웃던 분이셨다.
어느 해 인가 친정엄마와 막내 고모가 동시에 장티푸스에 걸렸었는데 한집에 환자가 두 명이 있으면 안 된다며 할머니가 친정엄마를 외가에 가서 몸조리를 하게 했었다.
하루는 외갓집에 가서 친정엄마를 보고 돌아온 아버지가 친정엄마가 아무래도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인다며 온 가족이 있는 자리에서 엉엉 우셨던 기억이 있다.

동사무소의 착오로 일 년 일찍 나온 나의 초등학교 입학통지서를 받고서 아버지는 뛸 듯이 기뻐하셨다고 한다.
반에서 키가 가장 작았던 내가, 10리 길(4km)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 안쓰러워 한 달을 넘게 업어서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왔던 분이셨다.

친정아버지의 교통사고

친정아버지는 큰딸인 나를 결혼시킨 다음 해인 49세에 오토바이 사고로 뇌내출혈이 발생해 의식불명으로 45일을 보냈다. 의식이 돌아온 후 10개월간 입원 치료를 받으셨는데 퇴원 후 3년째 되던 해에 급성폐렴으로 53세의 나이에 돌아가셨다.

친정아버지가 사고를 당했던 해는 1986년으로 아직 전 국민 대상으로 건강의료보험이 시행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뇌내출혈로 45일 만에 의식은 돌아왔지만 언어장애가 왔고 걸음을 걷지 못해 오랫동안 재활치료를 받아야만 했었다.
시골 동네에서 논농사를 지으며 젖소를 키우셨던 아버지는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다 보니 큰금액의 병원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착유를 하던 젖소 20마리를 헐값에 파는 것을 시작으로 밭과 논을 차례로 팔아야만 했었다.

사고난지 거의 일 년 만에 친정아버지는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목관 삽입을 했었고 콧줄로 음식을 공급받았었기에 음식을 먹다가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하고 음식을 흘리는 일도 많아 가족들과 한상에서 밥을 드실 수도 없었다.
친정엄마는 병원에서 아버지를 내내 간호를 하셨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아버지 병간호와 농사일을 도맡아 해야 했었다.
시간이 지나도 병세가 더 호전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퇴원 후에도 병원비를 갚아야 했고 약값도 계속 들어갔다.

친정아버지가 원하셨던 영양제

한 달에 한번 친정에 가면 친정엄마는 농사일로 지쳐 있었고, 아버지가 어린애가 되어 투정을 부리고 떼를 쓴다며 힘들어하셨다.
그럴 때면 친정아버지에게 엄마가 농사일을 하면서 아버지 간호하느냐 힘드니 아버지가 엄마 속상하게 하지 마시라고 이야기를 했고 내가 이야기하면 아버지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곤 하셨었다.
한 번은 친정집에 갔더니 은행잎이 큰 소쿠리에 수북이 쌓여있었다.
친정엄마는 한숨을 쉬면서 친정아버지가 TV에서 광고하는 혈액순환 개선제를 사달라고 하는데 안 사줬다니 은행잎을 잔뜩 주워와서 삶아달라고 한다며 속상해하셨다.

지금이라면 당장 아버지가 원하는 영양제를 구입해 드렸을 텐데 그때는 내가 그러지를 못했다.
결혼하면서 시부모님 댁에서 함께 살았고 시어머님이 집안 경제권을 갖고 있었다. 시어머님은 집안 반찬거리부터 생활용품은 물론이고 내가 입을 옷이나 화장품까지 직접 구입해다 주었고 친정에 갈 때에도 당신이 직접 시장에 가서 고기와 과일을 구입해서 들려서 보냈기에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전혀 없었다.

친정엄마는 병원비와 약값만 해도 버거운데 방송에 광고하는 약을 자꾸 사달라고 한다며 아버지 좀 말려보라고 하셨다.
친정엄마의 말을 듣고
"아버지 그 약이 은행잎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만든 거라지만 은행잎을 그대로 삶아서 드시면 나쁜 성분까지 먹을 수 있어 오히려 건강에 안 좋을 수 있어요. 그러니 은행잎 삶아 달라고 엄마한테 떼쓰지 말고 다 갖다가 버려요."라고 했다. 그리고 " 아버지는 힘든 엄마에게 왜 자꾸 어린아이처럼 생떼를 써요."라며 친정아버지에게 버럭 화를 냈다.
사실 친정아버지에게 화가 난 게 아니고 " 아버지 내가 다음에 사다 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라고 말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났던 거였다.
친정아버지는 친정엄마 말은 듣지 않고 떼만 쓰더니 내 말에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 그해 가을 영양제 한 병 사다 드리지 못했는데 친정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때늦은 후회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영양제 한병 못 사드린 게 너무 후회가 되었고, 사드리지도 못하며 화를 냈던 자신이 너무 미웠다. 그리고 남편이 미웠고 시어머님이 야속했다.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려 친정에서 시부모님들 말씀 순종하고, 사업하는 남편에게 잔소리하지 말라고 했던 말만 따랐다.
그리고 내가 싫은 말을 하면 집안이 시끄러워질까 봐 나하나만 참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았었다.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이듬해 봄에 남동생이 아버지 없이 결혼식을 하고 나서 나는 시댁에서 그동안 참았던 감정을 토해냈고 시아버님에게 남편과 별거하겠다고 했다.
시아버님은 시어머님과 남편을 따로 불러 불호령을 내리셨고 남편은 내게 그렇게 힘든지 몰랐다며 사과를 했다.
시어머님의 태도변화와 남편의 사과로 별거선언은 철회했지만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TV에서 아버지가 드시고 싶어 하셨던 영양제 광고가 나올 때마다 친정아버지 생각이 났고 그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친정아버지를 떠올리면 좋았던 기억보다 영양제 한병 못 사드리면서 오히려 화를 냈던 기억이 먼저 나서 한동안 의식적으로 친정아버지의 기억을 떠오르지 않으려 애썼고, 그래서 친정아버지를 마음껏 그리워해 보지도 못했었다.

친정엄마 병간호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친정엄마는 논 한 곳을 팔아 병원비 미납된 것을 다 갚고 남은 돈으로 아들에게 부평역 근처에 조그만 아파트를 구입해 주셨다.
친정엄마는 아버지가 언제 다시 병원에 입원할지 몰라 그때를 대비해서 돈을 아끼며 사셨던 거였는데 갑자기 급성폐렴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못 다해준 것 때문에 아파해하셨다.
친정엄마도 나이가 드시면서 15년을 넘게 당뇨합병증과 고혈압으로 고생을 하셨다. 10여 차례 수술을 받으셨고 돌아가시기 5년 전부터는 신장 투석까지 하셨었다.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후회했던 기억 때문에 친정엄마에게는 잘해드리고 싶어 나름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암투병을 하면서도 컨디션이 좋은 날은 친정엄마 음식을 만들어 드렸고, 돌아가시기 일 년 전 같은 아파트로 이사해서는 서로 다른 집에 살면서도 매일 친정엄마 집에 출근을 했다.
입맛이 없다는 친정엄마에게 매일 다른 음식을 만들어서 한수 저라고 더 드시게 했고, 요양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주일에 같이 교회에도 가고 외식도 했다.

외손주들 때문에 웃으셨던 아버지

유난히 어린아이들을 예뻐하던 친정아버지는 사고 나기 전 손녀딸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둥기 둥기' 하며 즐거워하셨다. 사고가 난 후로는 손녀딸을 데리고 놀아주지는 못해도 손녀딸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하셨다.
아들을 낳고 친정으로 몸조리를 하러 갔더니, 말씀은 못 하셔도 엄지손을 들어 보이며 싱글벙글 웃으셨다.
친정아버지는 종이에 '아들 낳아서 잘했다.'라고 글을 써서 보여주기까지 하셨다.
다행히 아들은 음식을 먹다 사래가 들려 기침을 하고 음식물을 흘리는 친정아버지를 무서워하거나 피하지 않고 가까이 가서 휴지로 입 주위를 닦아드리고는 했다. 친정아버지가 기침을 하면 등도 두들겨주고 두 팔을 벌리며 가서 안기기도 했었다.
친정아버지에게 해 드린 것이 너무 없는데, 그나마 아이들이 친정아버지를 웃게 해 드린 것이 유일한 효도였던 것 같다.

아버지!
시집보내던 날, 사위 손에 내손을 옮겨주며 눈물을 흘리셨던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그 든든했던 아버지가 사고로 어린아이가 되어버렸는데, 그때는 그런 아버지를 돌봐드릴 형편도, 마음에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만 있다면, 의식이 돌아왔을 때 자신의 모습에 낙담했을 아버지를 안아드리고 싶고 아버지가 원했던 영양제도 사드리고 싶습니다.
너무 죄송합니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