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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그리고 시어머니

시어머님이 살아온 이야기

by 토끼랑께 2021. 11. 19.

결혼 초 시어머님은 내게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셨다. 살면서 그때 시어머님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지 않았어야 했다고 후회한 적도 있었다.

시어머님 이야기

올해 85세인 시어머님은 황해도 아낙이 고향이시다.
시어머님은 맏딸이었고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고 한다.  시어머님이 5살 되던 해에 친정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셔서 아버지가 재혼을 하셨고 그 후로 새어머니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해방이 되고 남과 북 사이에 38선이 생기기는 했지만 한동안은 남과 북을 오가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새 어머님을 따라 서울에서 양복점을 하시는 큰아버지댁에 가게 되었는데, 새 어머님은 어머님을 큰아버지댁에 두고 볼일을 보고 오신다며 어디론가 가셨다고 한다.
그렇게 며칠 있으면 데리러 올 줄 알았던 새어머니는 오시지 않았고, 한동안 큰아버지댁에서 살고 있었는데 6.25 전쟁이 났다고 한다.  시어머님은 6.25 전쟁으로 인해 그렇게 친아버지와 여동생하고 영영 이별을 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큰아버지는 두 딸을 이북에 둔 채 서울에서 양복점을 하고 있었는데, 6.25 전쟁으로 인해 두 딸과 이별을 하게 되었고, 조카딸인 어머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한다.

 


큰아버지가 재혼을 하셔서 어머님은 새로 맞이한 큰어머니와 함께 큰아버지댁에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큰아버지가 몇 번 이혼을 하면서 큰어머니가 바뀌기도 했는데 마지막으로 함께 살게 된 큰어머니는 어머님에게 무척 잘해주셨다고 한다. 함경북도가 고향인 시아버님은 사촌형님과 살고 있었는데 큰어머님이 어머님과 결혼을 시키셨다고 한다.

큰어머님 덕분에 면사포를 쓸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셨다.

 

어머님이 결혼하고 몇 년 후에 친정엄마로 생각하고 의지했던 큰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큰아버지는 6.25 전쟁 때 피난을 내려온 두 딸을 다 성장한 후에 만나게 되었는데 큰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작은딸과 함께 사셨다고 한다.

하지만 시어머님은 친아버지와 여동생을 만나지 못하셨고 생사 확인조차 하지 못하고 살고 계시다.

 

시어머님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시어머님이 너무 안쓰럽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5살에 친엄마가 돌아가시고,  전쟁으로 아버지와 여동생과도 헤어져서 큰아버지 손에서 자랐으니 어려서부터 외롭고 마음 의지 할 곳이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어머님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면서 시어머님에게 잘해 드려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고, 시어머님이 시키는 일이면 힘이 들어도 불평하지 않고 그대로 따르며 살게 되었다.

 

화살나무

내가 만난 시어머님

남편과 결혼을 앞두고 시댁에 가서 음식을 먹어본 적이 있다.

집안도 너무 깨끗했고 손수 만드신 김치 만둣국이 너무 맛이 있었다. 친정엄마의 음식은 구수하고 푸짐한 솜씨였는데, 시어머님은 정갈하고 담백한 음식 솜씨를 갖고 있었다.

시댁 식구들 모두 만두를 너무 좋아해서 시어머님은 겨울에는 김치만두를 여름에는 호박과 야채를 넣은 고기만두를 항상 만들어서 냉동실에 보관해두고 수시로 끓여 주고 계셨다. 

가족들은 외식보다 집밥을 좋아해서 시어머님은 부엌에서 헤어나지를 못했고 항상 가족들 먹을 음식 장만에 분주했다.

 

시어머님은 부지런하고 결벽증이라고 할 정도로 깔끔한 분이셨다. 한겨울에도 거실 현관부터 대문으로 나가는 곳을 매일 물청소를 하고 마른걸레로 물기를 닦아냈다.

집안에 있는 거울과 액자 그리고 유리창을 매일 유리세정제를 뿌리고 마른걸레로 닦아냈다.

거실에서 TV를 볼 때에 손에 테이프를 감아 붙이고 습관처럼 카펫에 먼지를 수시로 닦아 내었다. 

그러면서도 한 달에 한 번은 가구를 옮겨놓고 집안 대청소를 했다.

종일 집안일을 하다 보니 시어머님은 마실을 다닐 새가 없었다며 집안은 엉망을 해놓고 마실 다니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셨다.

어머님은 당신이 살림하시던 방법을 그대로 내게 따르게 하셨다. 그리고 어머님처럼 잘하지는 못하지만 그대로 따라서 살아갔다.

 

화살나무

봄가을이면 아주머니들이 버스를 타고 단체로 관광을 다니는 일이 많던 시절인데 시어머님은 관광을 다니지도 않았다.

TV에서 주말에 나들이 가는 인파로 교통체증이 있다는 방송이 나오는 것을 보며 집안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편하게 지내면 되지 쓸데없이 왜들 저렇게 돌아다니냐고 혀를 차셨다.

 

어머님 방에는 도자기 그릇 세트와 커피잔 세트, 커피포트, 슬로우쿠커 , 토스트기, 다리미등 미국산 제품(시댁이 송탄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미군부대를 통해서 나오는 물건들을 구입해서 사용했다.) 들이 포장을 뜯지도 않은 채 엄청난 양이 있었다. 시어머님은 남들이 관광을 갈 때 안 가고 그 돈으로 살림을 샀다고 자랑을 하셨다.

남편의 말에 의하면 아들 장가들면 며느리 준다고 사 모아놓은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전기세가 든다는 이유로 한 번도 그 물건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시어머님의 자식사랑

시어머님은 외롭게 자라셔서 인지 자식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엄청났다.

자식들을 위하는 마음에 다 큰 아들임에도 생선가시를 발라주고 먹을 물을 말하기 전에 떠주었고, 상갓집에 다녀오는 아들을 대문에 들어서지 못하게 하고 온몸에 소금을 뿌리며 다시는 상갓집에 가지 말라고 했다.

결혼한 아들인데도 아들이 들어올 때까지 안 주무시고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술 먹고 들어오는 아들 꿀물을 직접 타서 주고 옷도 손수 챙겼다.

남편이 결혼하고 첫 명절에 친정에 함께 갔는데, 할아버지 할머니와 작은집 식구들까지 대가족이 모여 있자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긴장을 했는지 먹은 밥이 체했었다. 

시어머님은 처갓집에 가서 밥 먹고 체했다며 다음부터는 처갓집에 가면 밥 먹지 말고 그냥 오라고 하셨다.

친정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을 때 남편과 함께 병원에 가는데 시어머니가 딸아이를 없고 함께 가셨다. 중환자실에서 나온 남편이 얼굴이 노랗게 되어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시어머니는 친정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10개월 동안 다시는 면회를 가지 못하게 하셨다.

 

살면서 일반적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다른 일들도 많이 있었지만, 친정과 연관된 일은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럴 때마다 시어머님이 살아오신 환경과 처지 때문에 몰라서 그러신다 생각하고, 속상한 마음을 접고 내 마음을 추스르고는 했었다.

사철나무

연세 드신 시어머님

시어머님은 지금도 이웃집이나 경로당에 가는 것을 싫어하고 이웃에 사는 분들이 마실 와서 오래 앉아 있는 것도 싫어하신다. 친구도 없고 적적하지 않으시냐고 하면 집안일하다 보면 하루가 다 가고 바쁘다고 하신다.

명절이나 생신 때 우리 집에 모시고 와서 음식을 해드리고는 하는데 식사를 마치고 밥 수저를 놓으면서 바로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하신다. 내 집이 제일 편하다며 이제는 자식들 집에 오지도 않으신다.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하고 있고 허리와 다리가 불편해 병원에 모시고 가면 뼈의 문제라기보다 근력이 없어 그러니 걷기도 하고 활동을 하시라고 해도 힘들다며 들은 척도 안 하신다.

 

몇 년째 자식들은 시어머님을 편하게 해 드리려고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데 소용이 없다.

아들 3형제는 도대체 왜 이러시냐고 하며 속상해하는데 어머님은 지금이 편한데 왜 성가시게 하냐고 하며 그런 아들들이 오히려 서운하다고 하신다.

 

사철나무

지금은 그런 시어머님을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어머님은 그러시구나 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해하려고 하면 이해되지 않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지만, 그러시구나 하고 생각하면 있는 그대로를 받아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식들 입장에서 생각하는 어머님의 편안한 삶보다 어쩌면 어머님 스스로가 생각하는 편안한 삶이 어머니에게는 최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시어머님이 남은 노후를 자식들 효도받으며 편하고 즐겁게 보내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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