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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그리고 시어머니

친정엄마와 큰외숙모를 바라보며 나의 노후를 생각해 본다.

by 토끼랑께 2021. 5. 17.

어릴 적 나와 동생은 방학이 되면 서울에 사는 외사촌들과 자주 어울려서 지냈다. 나와 남동생은 7살에 학교를 들어갔고 외사촌 오빠와 외사촌 남동생은 8살에 학교에 들어갔다. 서로 한 살씩 차이가 나다 보니 오빠와 형으로 불렀는데, 학교는 같은 학년으로 다니게 되었다. 방학이 되면 네 명이 양쪽 집에 오가면서 방학숙제도 함께하며 사이좋게 지내기도 했지만, 싸움도 많이 하고 사고도 잘 쳤었다. 외사촌 오빠는 제일 맏이라는 책임감이 커서였는지 동생들을 잘 챙겼고 여동생인 나에게는 무엇이든 양보를 잘했었다.
친정엄마와 큰 외숙모는 성격이 비슷한 점이 많았는데 우리가 사고를 치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두 분 다 관용과 자비는 절대로 없는 분들이었다. 내 자식하고 조카의 구분 없이 바로 큰소리로 야단을 치고 경우에 따라서는 빗자루를 들고 쫓아올 때도 있었다. 굳이 어느 쪽이 더 쎄냐고 하면 아들 둘을 두고 있는 큰 외숙모의 목소리가 더 컸던 것 같다.
우리 넷은 친정엄마와 큰 외숙모의 야단 속에도 굴하지 않고 신나게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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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외숙모의 고단한 삶

큰 외숙모는 늘 엄마에게 '애기씨'라는 호칭을 사용했었고, 두 분이 젊었을 때는 큰 외숙모가 시누이인 엄마에게 깍듯하게 대했었다. 큰외삼촌은 서울 월계동에서 쌀가게를 두 개 운영하고 있었는데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다 보니 다른 사람 빚보증을 서주게 되었다. 어느 날 빚보증을 서준 일로 쌀가게를 둘 다 잃게 되셨다. 그 후로 누구 원망도 못하고 술만 드시더니 간경화로 몇 년간 고생을 하셨고 그때부터 큰 외숙모가 경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신림동에서 대학생들 하숙을 하며 집 앞에 포장마차까지 하셨는데 외삼촌은 결국 49세의 나이에 간경화가 심해져서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 후로 큰 외숙모는 시장에서 분식 장사를 하기도 하고 주변에 있는 대학교 청소를 하러 나가시기도 했다. 외할머니가 치매에 걸리시자 작은 외삼촌댁에서 사시던 외할머니를 모셔와 큰 외숙모가 외할머니 돌아가실 때까지 간병까지 하며 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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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에 대한 엄마의 안타까움

외할머니가 치매가 와서 큰 외숙모가 모시고 살게 되면서 친정엄마는 큰 외숙모에게 예전처럼 큰 소리를 치지 못하셨다. 친정엄마는 외가에 가서 외할머니를 보고 오면, 며칠 동안은 멍하니 있다가 한숨을 깊게 내어 쉬고는 했다. 한 번은 이웃집 아주머니와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되었는데 "내가 돌봐드릴 수도 없으니... 올케가 하는 게 마음에 차지 않아도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얼른 돌아가셔야 서로 편할 텐데..." "나도 그 입장이면 더 잘할 자신도 없고..."라며 한탄 섞인 말을 하신다. 그 말속에 외할머니를 향한 엄마의 애잔함이 묻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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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두 분의 남다른 정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큰 외숙모는 일 년에 두세 번 외할머니와 큰외삼촌 성묘를 내려왔던 길에, 그리고 친정엄마 생일에 우리 집에 들르고는 하셨다. 두 분은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데 두 분 다 개성이 강하고 취향이 서로 달라서 의견이 일치하는 일이 많지는 않았다. 친정엄마에게 '애기씨~"라고 하는 호칭은 바꾸지 않았지만, 큰외삼촌이 일찍 돌아가신 후 두 아들을 키우며 고생을 많이 하셔서인지 목소리도 더 커지고 자기주장도 강해지셨다. 예전에는 친정엄마 말이라면 다 받아주셨는대 이제는 당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신다. 두 분은 같은 공간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지만 무슨 배틀을 하듯 서로 상대 이야기는 건성으로 듣고 자신들의 이야기만을 하는데 그러면서도 서로 서운해하지도 않고 화내고 싸우지도 않는 것이 신기했다. 큰 외숙모는 올 때마다 친정엄마 선물을 챙겨서 오셨고, 큰 외숙모가 돌아갈 때는 친정엄마가 곡식과 야채를 챙겨드렸다.

자두

노후를 보내는 모습

시골에 사는 친정엄마는 취미라고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유일하게 화투치기가 전부였고 음식을 해서 자식들에게 보내주는 재미에 사셨다. 서울에 사는 큰 외숙모는 아들 둘을 결혼시켜 분가시킨 후 혼자서 사시면서 문화센터에 다니며 라인댄스로 건강을 챙기고, 사물놀이를 배워서 공연도 다니고, 휴대폰 사용하는 것을 배워서 인터넷 검색도 하고 문자도 잘 보내셨다.
어느 날 큰 외숙모가 사시던 동네가 재개발이 되면서 외숙모는 보상금을 받게 되었는데 두 아들에게 한 푼도 주지 않고 큰 외숙모를 위한 노후 자금으로 챙겼다.

토끼풀 꽃

자식을 대하는 태도와 서로 다른 노후생활

친정엄마는 그런 큰 외숙모를 보면서 그래도 아들들 얼마씩이라도 줘야지 너무 이기적이라고 했고, 외숙모는 자신이 갖고 쓰다가 남으면 주는 거지 왜 미리 주고 눈치 보고 사냐며 키워서 장가보냈으면 내 도리는 다한 거라고 하셨다.
친정엄마의 경우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몇 번에 나누어 남동생에게 다 넘겨주었다. 그리고 친정엄마 자신이 장만한 집만을 남겨놓고 살면서 남동생에게 재산을 물려준 대신 다달이 용돈을 받아서 생활하고 계셨었다.
친정엄마와 함께 사시던 친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 큰 외숙모는 일 년이면 몇 차례 오셔서 친정엄마랑 며칠씩 지내다 가시기도 했다. 큰 외숙모는 "나는 혼자 살아도 먹고 싶은 것 다 해 먹고 산다. 불고기가 먹고 싶으면 쇠고기 두어 근 사다가 양념해서, 한번 먹을 양으로 나눠 한 개는 볶아 먹고 나머지는 얼려놓았다가 먹고 싶을 때 꺼내서 먹으면 아주 좋다." 하신다.
문화센터 노래교실에 다니는 이야기를 하시며 자식들하고 살지 않아도 재미있게 잘 지내고 있다고 하신다. 요즘은 사물놀이도 잘해서 공연 다니면서 공연비를 받는 다고 자랑을 하셨다.
친정엄마에게 동사무소에서 하는 노래교실이나 라인댄스라도 다니시라고 권유를 해보았는데 친정엄마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다며 말도 못 꺼내게 했었다.

엉겅퀴꽃

살아온 길은 비슷했지만 노후를 대하는 모습은 다른 두 분

두 분 모두 남편이 일찍 돌아가셔서 혼자 자식들 키우고 결혼시키느냐 고생을 하면서 살았고, 남편보다 오래 사시는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았다. 두 분은 서로가 말하지 않아도 그 심정을 알다 보니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듯했다.
친정엄마는 자신을 위한 취미활동이나 건강을 챙기는 일에는 너무 인색하셨다. 재정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전적으로 아들과 의논하고 결정을 하며 사셨고 마지막으로 사시던 집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도 남은 돈 모두를 아들에게 맡기셨다.
친정엄마는 지금 노인병원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지내고 계신다. 70세가 되기 전부터 아프기 시작에 수많은 수술을 했고, 응급실에도 여러 번 실려 갔었다. 이제는 노인병원에서 신장투석을 하면서 온전한 정신은 하루 중 2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평생 건강하기만 하실 것 같았던 큰 외숙모도 이제는 거동이 불편해서 얼마 전 큰 아들과 함께 살고 계시다.

두 분의 삶 모두가 어떤 삶이 더 잘살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특히 질병으로 병원에 입원해 계신 친정엄마의 삶은, 지켜보는 자식으로서 안타깝기만 하다.
두 분 모두가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행복한 삶이었다고 생각하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뿐이다.

지칭개

두 분이 노후의 삶을 바라보며 나의 노후는 어떤 모습으로 준비해야 할지를 생각해 본다.
바람직한 노후의 삶이 되려면
건강을 지키기 위해 운동도 하고 골고루 영양섭취를 하면서 살아갈 거다.
집안에만 있지 않고 친구들과 만나고 여행도 다닐 거다.
가까운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지속적으로 맺으며 살아갈 거다.
욕심을 버리고 베푸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겠다.
매월 일정 금액을 지급하는 노후자금을 준비해놓고 살아갈 거다.
고집을 버리고 자녀들과 젊은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며 살아갈 거다.
자녀들이 진심으로 보살피려고 하는 것에 미안해하거나 맘에 없는 소리는 하지 않을 거다.
시대에 뒤처지지 않게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변화와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겠다.
무엇보다 늙은이가 아닌 노인(어르신)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겠다.

누구에게나 노후는 반드시 오게 되어있다. 그 노후의 모습은 지금을 사는 나의 결과물이다.

※ 비 온 후 동네 산책길에서 만난 꽃과 과일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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