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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그리고 시어머니

친정엄마가 이제 하나님나라로

by 토끼랑께 2021. 6. 11.

친정엄마가 돌아가신 지 이제 일주일이 지났다. 

돌아가시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고, 친정엄마의 장례식을 내손으로 치렀으면서도 꿈인 듯하다.

최근에 노인병원에 입원해서 생활하셨기에 아직도 병원에 계신 듯하고 돌아가셨다는 실감이 나지를 않는다.

평소와 다름없이 지내다가도 문득 친정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기억이 떠오를 때면 사시는 동안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게 사셨던 것이 안쓰러워 마음이 아려오고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그러다가 '이제는 육체의 고통을 더 이상 겪지 않으셔도 되는 하나님 나라에서 편히 계시겠지?'하고 생각하며 마음을 추스르고는 한다.

웃고계신 친정엄마의 영정사진


젊어서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집안일은 물론 농사일과 젖소 키우는 일까지 온갖 일을 다하셨고, 60세가 넘어 이제 좀 편히 쉬어야겠다고 하시더니 당뇨와 고혈압 그리고 관절염으로 16년이라는 세월을 10여 차례의 수술을 하시며 사셨다.

친정엄마는 5년 전 몸에 심어놓은 심장박동기의 과부하로 심정지가 된 적이 있었다. 다행히 스스로 이상을 감지하셨는지 119에 전화해서 병원에 바로 옮겨졌는데, 다행히 병원에 도착하신 후 심정지가 되어 심폐소생술로 살아나셨다. 그때부터는 몸이 더욱 안 좋아지셨고 만성신부전증으로 인해 집과 병원만을 오가며 혈액투석을 주 3회씩 하면서 사셨다. 시간이 갈수록 혈액투석을 힘들어하셨고 작년부터는 혈액투석을 하고 오는 날이면 두 눈을 감고 꼼짝도 못 하고 누워만 계셨다.

혈액 투석하는 일이 얼마나 괴로우시면 "그때 그대로 죽었어야 하는데..."라는 말을 하고 하셨다.

해가 갈수록 다리에 근력이 빠져 걷는 것이 힘들어졌고, 작년 11월에 지팡이를 잡고도 더 이상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게 되시자 투석하러 가신 날, 간호사를 통해 이제 노인병원에 입원할 테니 그리 알라고 전화하셨다. 

병원에 찾아가 입원 수속을 마치고 투석을 하고 병실로 올라갈 친정엄마를 보려고 기다렸다. 코로나 시국이라 입원을 하고 나면 맘대로 면회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투석을 마치고 입원실로 올라가시려고 휠체어를 타고 나오신 엄마는 나와 남편을 보고는 "그동안 너희가 수고 많았다." 하시며 어서 가라고 손짓을 하셨다.


엄마의 삶!  
엄마는 사시는 동안 언제가 가장 행복하셨을까? 
사람을 평가할 때 외모를 중시했고 책임감이 강했던 우리 엄마...
친정엄마는 결혼 전에 교회를 다니며 주일 교사까지 하셨던 분인데 아버지와 맞선을 보고 아버지의 잘생긴 외모에 반해 "결혼해서 시댁 식구 모두를  전도하면 된다"라고 큰소리치며 아버지와 결혼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결혼과  동시에 교회는 더 이상 다니지를 못하시게 되었다.
엄마는 맏며느리의 책임을 중시했고 최선을 다했다. 시동생들 취직을 위해 발 벗고 나서셨고 시누이 둘이 입은 옷이 낡아있는 것을 보고는 엄마가 결혼할 때 해온 한복을 뜯어 새로 만들어 입혔다고 한다. 삼촌들과 고모들의 결혼도 엄마가 모든 걸 준비해서 치르셨다. 분가한 삼촌들과 고모들이 집에 올 때면 집안에 곡식과 음식을 아끼지 않고 퍼주셨다. 그로 인해 집안 어른들은 늘 맏며느리를 잘 얻었다고 칭찬하셨고, 할머니 친구분들이 자신들의 며느리에게 "00 엄마 하는 것 반만이라도 해봐라"하는  소리를 들으시며 사셨다.

양쪽 무릎을 인공관절로 수술하고, 심장박동기를 달고 주 3회 투석을 하면서도 아들 며느리한테 제사를 넘기지 않고 직접 제사와 명절 음식 준비를 했다. 한집에 살며 암 진단을 받고 항암 치료하느냐 구토하는 딸이 있어도 친정엄마에게는 멈출 수 없는 맏며느리로서의 책임이었다.

6.25 전쟁으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대신해 살림을 이끌어가시는 외할머니를 돕고, 6.25 전쟁이 발발하던 날 태어난 12살 아래인 동생을 돌보며 일찍부터 어른이어야 했던 친정엄마는 친정에서도 그리고 결혼 후 시댁에서도 자기 자신보다는 가족들이 우선인 삶을 사셨다.

2년 전 나의 간곡한 부탁을 받아들여 마지막으로 추석명절을 손수 준비해서 차린 후 모든 제사를 아들에게 넘기고 나와 교회를 나가기 시작하셨다.
교회 주일예배는 코로나19로 인해 4개월 정도 밖에는 못 다니셨지만 다니는 동안 열심히 찬양도 부르시고 예배가 끝나면 함께 외식도 하셨다. 5년간 집과 병원만을 다니셨던 친정엄마를 그때라도 모시고 다녔던 것이 지금의 내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


이제 더 이상 혈액투석을 안 해도 되고, 혈관이 막혀 카테터 시술을 안 해도 되고, 툭하면 코피가 나서 콧속 혈관에 하던 전기 소작을 안 해도 된다.
최근 친정엄마의 모습이 너무 고통스러워 보여 나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시는 저희 엄마가 너무 고통스러우니 제발 이제 하나님품으로 데려가 주세요."라고 기도를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가 이런 삶이라도 더 살고 싶으셨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주 금요일 저녁 가쁜 숨을 쉬는 친정엄마 앞에서 우리는 "엄마 그동안 너무 고생하셨어요. 엄마 사랑해요. 그리고 감사해요."라고 말했다. 손주 사위의 마지막 기도를 들으시고 친정엄마는 그렇게 하나님 품에 안기셨다. 
장례를 치르고 친정엄마의 유골함을 31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골함 옆에 나란히 안치했다. 부부금실이 유난히도 좋았던 두 분이 이제는 함께 계시게 되었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되었다.



사는 날 동안 엄마가 그리울 날이 많겠지... 

우리들의 여장부! 큰 바위처럼 든든했던 우리 엄마! 사랑합니다. 그리고 너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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