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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그리고 시어머니

돌아가신 친정엄마의 남아 있는 흔적

by 토끼랑께 2021. 7. 9.

친정엄마가 돌아가신 지 한 달이 넘었다. 그런데 나의 생활 여러 곳에 친정엄마의 흔적이 남아있다.

결혼한 지 10년 만에 직장에 다니게 되면서 시작한 친정살이는, 작년 1월 아파트로 이사 오기까지 24년을 하고 살았다.
7년 전 내가 대장암을 진단받고 수술과 항암치료를 하면서 암 요양병원에 입원했던 시기를 빼고는 친정엄마와 늘 함께 살았던 것이다.
작년 1월에 몇 대에 걸쳐 살았던 마을 전체가 아파트 부지로 수용되면서 동네 뒤편에 있는 신축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하면서 한집으로 이사하자고 권유를 했었는데 친정엄마는 절대로 싫다고 하며 같은 아파트 옆 동에 사셨다. 혼자 계시는 친정엄마가 걱정되어 거의 일 년 동안 매일 친정엄마 집으로 출근을 했었다.
오전에 요양보호사가 돌보아 드리고 가면 오후에는 내가 가서 저녁밥을 챙겨드리고 설거지를 한 후 집으로 돌아왔었다.

친정엄마의 노인 전문병원 입원

주 3회 노인전문병원으로 신장투석을 하러 다니던 친정엄마는 점점 기력이 떨어져 이사한 지 10개월 만에 노인전문병원에 스스로 입원을 하셨다. 입원 수속을 마치고 투석 후 병실로 올라가는 친정엄마 얼굴을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휠체어를 타고 계신 엄마는 나와 남편에게 " 그동안 너희가 고생했다."라고 말씀을 했다. 어쩌면 친정엄마는 이제 입원하면 다시 집으로 못 올 수도 있다는 것을 감지하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입원한 지 7개월 만에 친정엄마는 돌아가셨다.

오이지

하지만 지금도 나는 친정엄마가 노인병원에 입원하고 계신 듯하다.

처음에는 병원에 입원하신 엄마가 걱정되어 매일 전화해서 드시고 싶은 것을 물어보고 만들어다 드리고 했다. 병원에서는 자꾸 외부음식을 드시면 병원밥을 적응 못하신다고 하지만 엄마가 사시면 얼마나 사시겠냐는 마음에 샐러드, 잡채, 호박죽, 찰밥, 보리밥 과일까지 번갈아서 만들어다 드렸다.

김장김치와 동치미가 적당히 익어을 때는 군고구마와 함께 갖다 드렸더니 같은 병실분들과 잘 나누어 드셨다고 했다.
그러다가 1월 노인병원에서 주저앉아 고관절 골절로 수술을 하신 후로는 그나마 드시던 것도 못 드시고 치매 증상까지 나타났다. 그 후로는 일반식을 못 드시고 죽만 드신다고 해서, 집에서 녹두죽, 팥죽, 호박죽, 잣죽을 번갈아 끓여다가 드렸는데 나중에는 그것도 못 드신다며 해오지 말라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전화를 해도 못 알아듣고 다른 말만 하시기도 하고 아예 전화를 받을 수 없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도 점점 친정엄마와 통화를 덜하게 되고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없으니 관심도 덜 갖게 되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렇게 나는 친정엄마와의 이별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가시면서도 자식들을 생각하셨나?

친정엄마도 그렇게 점점 세상과의 이별을 하고 계셨다.
어찌 생각하면 친정엄마가 당신이 돌아가신 후 옆에 늘 함께 했던 내가 덜 힘들게 하시려고 그랬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만약 한집에 살다가 그대로 돌아가셨다면 집안 이곳저곳에 친정엄마의 흔적이 남아 있어 더욱더 힘들었을 텐데, 매일 얼굴을 보기는 했지만 서로 다른 공간에서 지냈었고, 노인전문병원에 입원해 계시며 간식을 요청해서 드시다가, 간식을 보내드려도 못 드시다가 그렇게 어느 날 저녁 주무시듯 돌아가셨다.

친정엄마를 위한 음식을 위해 준비해 놓았던 식재료들

친정엄마가 계시지 않은 지금, 친정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드리려고 냉장고에 보관해놓았던 완두콩, 늙은 호박, 팥이 냉동실에 남아 있다.

무우 짠지

김치 냉장고에 친정엄마가 여름이면 늘 찾던 무짠지도 그대로 남아 있다.

친정엄마를 따라가는 나의 모습

오이지를 담그면서 친정엄마가 오이지를 담그다가 화상 입었던 일과 친정엄마가 오이지 담그던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 장마 끝나면 무와 배추 가격이 오른다며 미리 여름김치를 넉넉히 담았던 친정엄마가 생각나 나 역시 배추와 무를 사서 김치를 잔뜩 담았다.
아마 내가 살아가는 동안, 친정엄마가 좋아하던 음식과 식재료를 볼 때 그리고 친정엄마가 음식을 만들 때 옆에서 도우며 배웠던 음식들을 만들 때 친정엄마를 떠올리겠지?

산수국

4년 전 돌아가실 뻔했던 친정엄마

친정엄마는 4년 전에 돌아가실 뻔했었다. 심정지가 와서 심폐소생술로 살아나셨는데 그 후로 신장투석을 하면서 사셨다. 어쩌면 친정엄마에게는 그 시간이 더 힘드셨을지 모르지만 나는 친정엄마와 애증의 관계를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돌아가시고 나서 후회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때 그대로 돌아가셨다면 아마도 친정엄마와 풀지 못한 마음속 찌꺼기로 아주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친정엄마가 다시 교회에 나가게 되신 것과 하나님 나라에 갈 거라는 확신을 갖고 돌아가신 거였다.

친정엄마의 유골함을 31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유골함 옆에 나란히 넣으며 이제 두 분이 함께 계시다는 것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개망초

더 많은 세월이 흘러도 친정엄마의 흔적은 내 마음과 생활 속 곳곳에 남아 있겠지...

친정엄마가 돌아가시고 한 달 동안 집안일을 더 많이 하고, 여행도 더 많이 다녔다.
가만히 있으면 자꾸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만 무거워져서였다.
이제는 일부러 잊으려고 할 거 없이 그대로 이렇게 세월의 흐름 속에 맡기며, 생각나면 나는 대로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살아가려고 한다.

이제는 육신의 고통을 벗고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계실 친정엄마의 행복한 모습만을 생각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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