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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그리고 시어머니

친정엄마의 아파트 생활 적응기

by 토끼랑께 2021. 4. 6.

아파트로 이사하게된 친정엄마

친정엄마는 작년 1월에 결혼하시고 60년 가까이 살았던 집에서 동네 뒤에 새로 지은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동네 전체가 아파트 단지로 수용되면서 어쩔 수 없이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동네분들 중 일부는 아직 농사를 짓고 있어서 농사짓는 땅에 집을 지어 이사를 했고, 일부는 건설회사에서 대토로 주는 곳에 집을 지어 가기로 했다. 우리를 포함한 일부는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동네 전체가 수용되자 남동생은 친정엄마에게 동생집으로 들어와 함께 살자고 제안을 했다. 친정엄마는 아들 며느리와 살았던 적이 없었는데 이제와서 병들어 불편한 몸으로 함께 살기 싫다고 하셨다. 또 동네분들이 근처에 다 살게 되었으니 마을에서 멀리 떠나기 싫다고 했다. 결국 친정엄마와 나는 같은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친정엄마와 우리 집은 동은 다르지만 같은 단지이고 가까이에 있어 내가 매일 드나들기는 좋았다. 남동생은 예전에는 내가 친정엄마와 한집에 살았기에 명절과 행사가 있는 날에만 왔었다. 친정엄마가 혼자 사시게 되자 엄마가 새집에 정붙을 때까지 혼자있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며 매주 금요일 밤에 와서 토요일 점심을 먹고 가는 일을 반년을 넘게 했다. 그 후로도 2주에 한 번씩 와서 엄마와 함께 지내다가 갔다. 엄마는 아들을 장가보낸 후 가장 자주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여동생도 한 달에 한두 번씩 엄마를 찾아왔다.

아파트 생활에 익숙하지 않으신 아주머니들

아파트로 이사를 하자 매일 마실 오시던 아주머니들이 한동안 마실을 오시지 않았다. 집을 짓느냐 아직 동네에 살고 계신 분도 계시고 다른 동으로 이사 오신 분들도 계셨는데 문제는 공동현관에 와서 초인종을 누르지를 못하는 거였다. 본인들 집에 들어갈때에는 출입카드를 대고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남의 집에 오면 호수를 누르고 호출을 눌러야 하는데 그것을 할 줄 모르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아주머니들에게 내 전화번호를 알려드리고 친정엄마 집에 오실 때 전화하면 내가 가서 문을 열어 줬다.

한 번은 이웃집 당숙모가 밭에서 파를 뽑아서는 예전에 우리 집 대문 앞에 갖다 놓듯이 친정엄마가 사시는 동 1층 화단에 갖다 놓고 가져가라고 전화가 왔다. 산책로를 따라 걷기 운동을 하느냐 20분 넘는 거리에 있던 나는 허겁지겁 돌아왔다. 파는 그 자리에 잘 있어서 챙겼지만 가끔씩 벌어지는 일이어서 멀리 나가지를 못하고 있어야 했다.

친정엄마의 간식 사 먹는 재미

우리가 살던 마을은 큰 도로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들어와야 했는데, 마을까지 운행되는 버스가 하루에 몇 번 들어오지 않았다. 필요한 물건을 사려면 승용차로 10분 이상 걸리는 대형마트나 시장에 다녀와야만 했다. 배달이 가능한 음식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아파트로 이사오니 신세계가 펼쳐졌다. 아파트 앞에 요일별로 다른 푸드트럭이 들어오고, 아파트 상가에 슈퍼뿐 아니라 제과점과 치킨집 분식점이 생겼다. 나는 친정엄마에게 매일 메뉴를 바꿔 푸드트럭 음식과 상가 분식점 음식을 사다 드렸다. 돈가스, 튀김, 순대, 김밥과 갓 구운 밤식빵을 주로 사다 드렸는데 반찬 불평이 많던 친정엄마도 매일 바뀌는 메뉴에 좋아하셨고 신기해하셨다. 일주일에 한 번은 요양보호사와 짜장면을 시켜서 드시기도 하셨다.

이사 후에도 아주머니들 놀이터가 된 엄마 집

탱자 꽃

친정엄마는 먹어본 음식 중 맛있던 음식을 동네 아주머니들이 놀러 오시면 내게 전화해서 사 갖고 오라고 했다. 배달을 시키기도 하고 내가 직접 사다가 드리기도 했다. 마실 오시는 아주머니들은 대부분 자녀들과 살지 않고 혼자 사시는 분들이 많아서 옆에서 챙기는 딸이 있는 것을 부러워했고, 집 가까이에서 손쉽게 사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신기해하셨다. 친정엄마 아파트 아래층에 사시는 아주머니는 이사하기 전 동네에서 바로 앞집에 사시던 분이다. 아주머니는 딸이 3명이었는데 매일 드나드는 나를 보며 "우리 딸들은 따로따로 오면 좋을 텐데 한꺼번에 왔다가 가!" 하시며 부러워하신다. 그런 모습을 보고 친정엄마는 으스대며 좋아했다. 그렇게 친정엄마는 아파트 생활에 재미를 붙여가시기 시작했다.

야속하기만 한 코로나 19

배꽃

아파트로 이사한 후에도 나는 친정엄마를 모시고 교회에 나갔다. 예배가 끝나고 나면 외식을 하기도 하고 더러는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식사를 하시고 저녁에 모셔다 드리고는 했다. 그런데 코로나 19가 발생되면서 교회에 더 이상 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 외식도 교회에 갔다 오는 길에는 다니셨지만 일부러는 나가지 않으려고 하셔서 중단이 되었다.
아주머니들에게 현관 초인종 누르는 방법을 알려드렸고 익숙해져 갔는데 아주머니들 역시 코로나 19로 모두가 집안에만 있게 되어 마실을 거의 오시지 않았다.

친정엄마 집에서 저녁 먹기

그 후로는 내가 친정엄마 집에 가있는 시간이 더 길어졌고 남편이 저녁을 먹고 들어오게 되는 날은 친정엄마와 저녁까지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은 친정엄마 집으로 남편이 퇴근해서 세 식구가 같이 저녁을 먹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친정엄마는 저녁을 먹고 일어서는 우리에게 "덕분에 잘 먹었다. 또 와서 먹어라."라고 말하고는 했다. 친정엄마와 20년을 함께 살아온 기간 중에 아파트로 이사 가서 살은 10개월이 가장 친정엄마와 잘 지냈던 것 같다. 서로 이야기도 많이 했고 친정엄마가 원하는 음식도 많이 만들어 드렸다. 남편은 친정엄마와 분리되고 나니 마음이 편해서인지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먼저 장모님하고 밥 먹자고 하기도 했다.

할미꽃

체력이 갈수록 떨어지는 친정엄마

신장투석이 길어지며 친정엄마는 갈수록 힘들어했고 다리에 근력이 떨어져 보행보조기인 바퀴 워커와 노인용 유모차를 의지하고도 걷기가 어려워졌다. 신장 투석을 하기에 소변량이 줄어 거의 화장실 가는 일이 거의 없지만 어쩌다 화장실에 가게 되어도 너무 힘겨워했다.

노인병원에 스스로 입원한 친정엄마

아파트로 이사한 지 10개월쯤 되던 어느 날 신장투석을 하러 병원에 가신 친정엄마는 병원에 입원하겠다고 병원 직원을 통해 내게 전화로 알렸다. 남편과 나는 두 동생에게 알리고 친정엄마가 입원 시 필요한 물품을 준비해서 노인병원에 갔다. 도착하니 친정엄마는 투석 중이었고 나는 친정엄마의 입원 수속을 했다. 친정엄마가 병실로 올라가시고 나면 얼굴을 뵙기 어렵기에 1층 투석실 앞에서 기다렸다. 투석을 마치고 나온 친정엄마는 나와 남편을 보자 가라고 손짓을 했다. 우리가 다가가서 손을 잡고 "괜찮으시겠어요?"하고 여쭤보니 이젠 더 이상 집에서 못 있겠다며 "그동안 둘 다 애썼다."라고 말씀하셨다.
15년 전 처음 디스크 수술을 시작으로 수많은 수술과 입원을 반복했던 엄마는 신장투석을 시작한 지 4년 만에 노인전문병원에 스스로 입원을 하셨다. "나는 요양병원 싫으니 너나 좋으면 요양병원으로 가!"하고 소리치던 분이 스스로 입원을 결심했을 때에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친정엄마가 다시 퇴원해서 집에 올 수 있을까?

결혼 후 10년 만에 친정집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친정엄마와 수많은 일을 겪으며 살았다. 내가 암이 걸린 후에는 친정엄마와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기도 했고 한집에서 두 명의 환자가 번갈아 가면 병원에 입퇴원을 하며 살았었다.
분가를 결심한 후 같이 사는 동안이라도 최선을 다해 친정엄마와 잘 지내보려고 애썼던 날들이 엄마와 나의 관계를 호전시켰고 그 덕분에 내 마음도 치유가 되었다. 아파트에 1년도 살아보지 못하고 노인병원에 입원하시는 친정엄마를 보며 동네가 수용되지만 않았어도, 코로나 19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빨리 노인병원에 입원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친정엄마를 병원에 두고 돌아서는 발길이 너무도 무겁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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